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트리치 사건 (문단 편집) == 전개 == [[1925년]] [[10월 18일]] 밤, [[그리스군]] 병영을 뛰쳐나간 개를 쫓던 한 병사가 실수로 국경을 넘었고, [[불가리아군]] 측에서 그를 사살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페트리치 사건이 "길잃은 개의 전쟁"이라는 이명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더군더나 불가리아군은 이 사태를 그리스의 침공으로 오인, 비상이 걸려 상부에서 반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불가리아군은 명령을 받아들여 벨라시타 국경선을 넘어 그리스 보초병과 일직장교를 11명을 사살한다. 불가리아 측에서는 실수였음을 주장하며 유감을 표했지만, 테오도로스 팡갈로스 장군의 군사정권이 통치하고 있었던 [[그리스 제2공화국]]은 [[불가리아 왕국]]에 48시간 이내에 관련자를 처벌하고 사과할 것과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총합 2백만 [[프랑스 프랑]]] 지급하라고 요구하며 [[10월 22일]] 페트리치를 무력 점령을 위해 군대를 보내고 그리스군과 불가리아군 간의 무력충돌로 격화된다.[* 당대의 신문기사들 일부는 그리스군이 페트리치를 점령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는 페트리치에서의 전투 이전에 국제연맹의 명령으로 페트리치에서의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불가리아는 사태가 그리스와의 무력충돌로 번지자마자 [[국제연맹]]에 도움을 요청했다. [[국제연맹]]은 곧바로 중재에 나서 즉시 휴전을 명령, 사태의 격화를 그리스군의 불가리아 침공으로 판단하여 그리스에 45,000파운드를 2개월에 걸쳐 불가리아 측에 지불할 것과 그리스군의 철군 결정을 내렸고, 양 국은 이 결정을 수용하면서 이 분쟁이 끝이 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